환상

카테고리 없음 2019. 12. 9. 15:42 |
환상
에스겔 1:4-28
2019년 12월 15일 주일낮 11시 인도설교 선형수 목사 주은혜교회 진천
서로 인사합니다 반갑고 고맙습니다

환상은 꿈이 아니다. 깨어있는 경험이다. 물리적 현실에 근거해서 선지자가 주목하게 한다. 이어서 신비한 상상이 선지자를 압도하고 그를 소리와 환상의 영역으로 빠져들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폭풍을 보았지만 에스겔 한사람만 이 환상을 보았다.
   돈과 부귀영화를 탐하던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가는데 칼을 뽑아든 천사를 나귀는 보았고 발람은 보지 못했다(민수기 22:23-27). 엘리사 선지자는 하늘의 말들과 병거들을 보았는데 그의 종은 보지 못했다(열왕기하 6:16-17). 환상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보여 준다. 믈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환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에게 보여 주신다.
   거짓 선지자들이 악한 마음을 가지고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거짓 선지자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는 자다. 예레미야 23:25-32에 거짓 선지자들의 환상에 대한 경고가 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알이나 우상 혹은 거짓에 눈을 돌리게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 만든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말씀했다고 선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짓되게 잘못된 길로 가게 한다.
   북쪽에서 오는 폭풍은 하나님 자신이 오심을 생각하게 한다. 우주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역사속에 개입하신다. 한 인간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과 심판을 경고하고자 하신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망했다. 그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 불의, 죄악을 인간 막대기들을 들어서 심판하신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제하는 주인은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인간 막대기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이심을 말씀하고자 에스겔에게 환상을 통하여 말씀  하신다. 에스겔 1장26의 묘사대로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 위에 보좌에 앉아 계신다. 보좌에 앉아 계심은 통치와 주권이 여호와께 있음을 의미한다.
   네 생물중 인간의 얼굴은 항상 남쪽을 바라보고 사자의 얼굴은 서쪽을 보고, 황소의 얼굴은 동쪽을 보고 독수리의 얼굴은 북쪽을 바라본다. 이것은 온 세계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지배를 의미한다. 생물들은 두 쌍의 날개들을 가졌는데 한 쌍은 머리 위를 가리고 다른 둘은 몸을 가린다(겔1:11). 이사야 6:2의 스랍들과 비슷하다. 탈굼의 설명은 “거룩한 수종자들은 여섯 날개들을 가졌는데 두 날개는 자신들의 얼굴을 가려서 여호와 하나님을 보지 않도록 하고, 둘은 자신들의 몸을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한다. 나머지 둘로 섬기는 일을 한다.”
   알굴을 가려서 하나님을 보지 않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기 때문이다. 몸을 가리는 것은 몸의 성기를 가리는 것인데 피조물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이다. 천사들이 성기가 있는지 없는지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 다만 부끄러움을 감춘다는 의미이다.
   15-21절은 바퀴들을 묘사한다. 네 방향으로 회전없이 갈 수 있다.  생물들의 영이 바퀴들 안에서 활동한다. 18b에 “모든 네 비퀴들의 축들에 눈들이 가득했다.” 유대인들은 천사들의 사역을 묘사하는데 바퀴들, 스랍들, 그룹들, 천사들을 동급으로 본다(참고 William H. Brownlee, Ezekiel 1-19, WBC(Texas:Word, 1986), 10-17).
   1장4절 이하의 묘사들은 28절로 요약된다. “여호와의 영광의 모습을 나타냈다.” 요나단의 탈굼은 에스겔 1:24-25를 다음과 같이 옮긴다.

24 내가 그들의 날개들의 소리를 들었다. 강력한 물소리처럼, 전능자에게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이 순행할 때 그들의 발언의 소리는 모든 시대의 왕이시요 영원하신 여호와께 대한 감사와 축복처럼 들렸다. 높은 곳에서 천사들의 진영을 짓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들이 움직임을 멈출 때마다 그들의 날개들은 침묵했다.
25 어느때든지 그의 종들인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선포할 의지가 주님께 있다. 그들의 머리들 위에 있는 궁창의 높은 곳으로부터 발산하는 음성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자 그들이 고요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들의 날개들이 침묵한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낮고 천한 흙에서 온 인간에게, 혹은 선지자 에스겔에게 말씀하고자 찾아 오심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생각하게 한다.
   빌립보서 2장 5절-11절에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의 모양이 되셨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하나님이 그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두셨다. 하늘이나 땅이나 땅아래나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 꿇게 하셨다.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다.”
   에스겔 선지자는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 땅에 꿇어 엎드렸다(겔1:28b). 에스겔은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사야 40:3,6에서도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다.
   요한계시록 4장은 에스겔 1장의 하늘의 영역을 해석한다. 선지자가 초월적 영역으로 붙들려 올라간다. 거기서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고 무지개에 둘러싸인 것을 보았다. 에스겔 1장 26-28의 내용과 흡사하다. 계시록 4장 5절의 번개, 천둥, 일곱 횃불은 에스겔 1:13, 24와 유사하다. 계시록 4:6a의 수정같은 유리 바다는 에스겔 1:22의 하늘의 얼음 돔의 지붕과 비슷하다.
   계시록 4장6절의 네 생물은 에스겔 1장18의 앞과 귀에 눈들이 가득한 바퀴들을 연상시킨다. 계시록 4장7절의 네 얼굴들은 분리된 피조물들 중에 있다. 이는 에스겔 1장10절의 각각의 얼굴을 가진 생물과 유사하다. 계시록 4:8과 이사야6:3에 묘사된 스랍들 처럼 여섯 날개들을 가진 생물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찬양한다.
   계시록 4:11은 그들이(천사들과 신자들과 모든 피조물들) 하나님을 전능하신 왕으로 찬양한다. 하늘의 산헤드린 이라고 할 수 있는 이십사 장로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계 4:9-10). 우리가 예배 시간에 찬송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리는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 올려 드린다(계 5:8-10). 모든 천사적 존재들(계 5:11-12)과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계 5::13-14)이 함께 합창하여 찬양을 드린다. 계 5:1의 앞과  뒤에 적힌 두루마리는 계시록 2:9-10의 에스겔의 두루마리를 연상시킨다. 성육신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두루마리를 여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계 19:13). 에스겔의 환상 중에 본 인자 같은 분은 하나님의 어린 양, 구속주이시고, 하늘의 찬양을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받으시는 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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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F5BcywZd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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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선지자
 
에스겔 1장 1-3절
2019년 12월 8일 주일낮 주은혜 교회 진천 인도 및 설교 선형수 목사
서로 인사합니다. 반갑고 고맙습니다.

에스겔은 남유다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시기의 선지자였다(겔 1:1-3). 제사장 부찌의 아들이다.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 에스겔과 같은 제사장, 귀족, 지식인들이 함께 끌려갔다(왕하 24:10-17; 겔 1:2).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 또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여 살아가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불순종하고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고 불의와 죄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 인간의 죄나 불순종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하거나 덜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은 불변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악을 범하면 그런 인간 공동체와 사회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바벨론 그발 강가 텔아비브에서 유대포로들과 함께 살았다 (겔3:15). 그 후 5년 뒤 주전 592년에 선지자로 부르심 받았다. 에스겔은 22년간 예언 활동을 하다가 주전 570년에 바벨론에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겔 29:17).
   바벨론 포로기에 에스겔과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에 살면서, 예레미야는 주로 유대 땅에서 예언 활동을 하였다. 각자 주어진 사명과 환경이 달랐지만 모두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증거한 점이 같다.
   에스겔이 선지자로 부름 받아서 사역한 기간은 주전 592년에서 570년까지 22년 동안이다. 바벨론에 의해 유다와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된 시기는 주전 586년이다. 에스겔은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기 12년 전에 여호야긴 왕과 다른 제사장, 귀족, 지식인들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왔다. 바벨론에 산지 5년 째에, 즉 예루살렘과 유다가 완전히 바벨론에 함락되기 7년 전에 선짖자로 선지자로 부름받았다. 에스겔이 부름받은 곳은 바벨론 땅 그발 강가의 텔아비브이다.
   에스겔서는 히브리어 성경 안에서 이사야, 예레미야와 함께 3대 대선지서이다. 대선지서 소선지서 구분은 책 내용의 크기(길이)에 따른 구분이다. 칠십인경은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 사이에 애가를 둔다. 예레미야서와 애가서를 예레미야 선지자의 저작으로 보기 때문이다.
   선지자 에스겔의 이름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강하시고 이기시는 분이다.” 3장14절 하반절에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강하였다.”고 말한다. 에스겔을 부르실 때 하나님의 임재와 위임의 감각으로 그를 압도하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강하게 하신다.” 30장 25절에 전반부에 “그래서 내가 바벨론 왕의 팔들을 강하게 하리라.” 말씀한다. 또 34장 15-16절에서 “내가 나의 양떼 중에 병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리라.” 말씀하신다.
셋째, “하나님이 단단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3장 7절과 8절에  이스라엘 집이 하나님도 에스겔의 말도 듣지 않고 완고하고 고집이 세다고 하신다. 그래서 에스겔의 얼굴과 이마를 그들의 얼굴과 이마처럼 단단하게 하여, 에스겔이 위축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에스겔서 1장에서 24장은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언 한다. 25장에서 32장은 주변 국가들의 심판을 예언한다. 첫째 부분은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둘째 부분은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 예언이다. 셋째는 애굽에 대한 예언이다.
   에스겔 33장에서 48장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회복을 예언한다. 에스겔서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 에스겔서 40장에서 48장은 회복의 환상이다.  에스겔이 본 회복된 성전에 대한 환상(40-43; 46:19-47:12)은 시내산 위에서 모세가 장막에 대하여 본 환상(출 25:8-18)과 비교될 수 있다. 에스겔이 받은 미래의 예배에 관한 규정(43:18-46:15)은 모세가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받은 규정(민수기 27:12-29:40)과 밀접하다. 에스겔이 받은 땅 분배에 대한 프로그램(47:13-48:35)은 모세가 받은 프로그램(민수기 34-36)과 비교될 수 있다. 모세가 받은 땅 분배 계획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계자 여호수아가 실행하게 된다(여호수아 13-23)
   에스겔 37장에서 시드기야의 쓰러진 전사들의 마른 뼈들을 골짜기에서 보게 된다. 마른뼈들이 살아있는 전사들로 살아나는 환상은 부활된 나라의 비전이다. 그 마른뼈 골짜기는 길갈에 가깝다. 골라(גולה)는 “포로”라는 뜻인데 길갈(גלגל)이라는 지명을 숨기고 있는 말일 수 있다.
   “내가 포로들 중에 혹은 길갈에 있었다.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었다. 그가 나를 평지(골짜기) 가운데로 이끌었다. 거기에 뼈들이 가득하였다.”(이스라엘은 낮은 언덕이나 산으로 둘러싸인 평원을 골짜기로 표현한다). 길갈은 폐허가 된 상태이므로 에스겔이 여기에 길갈 대신에 골라(גולה) 즉 (귀환한) 포로들로 썼을 수 있다. 골라는 에스라 8:35; 10:6-8,16에 “(귀환한) 포로들”에 사용한 단어이다.
     에스겔 1장1절에 30년 째에 라는 말은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요시야 왕의 개혁운동의 해로 부터 30년이 지나간 해라는 의미일 수 있다.
둘째, 에스겔 선지자가 출생한지 30년째라는 뜻일 수 있다.
셋째, 여호야친 왕이 포로로 잡혀간지 30년 되던 해라는 뜻일 수 있다.
   세 번째 해석을 선호하는데, 다른 연대들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자기 백성을 길갈로 돌아오게 하여 그 땅에 새롭게 정착하게 하는 여호수아와 비슷하다.
   에스겔 29:17-21은 애굽의 운명에 대한 것이다. 29:17-18은 주전571년 4월26일로 추정한다(Leslie C. Allen, Ezekiel 20-48,WBC, 109참조). 26:1-6은 두로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한다. 두로는 페니키아 도시국가로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는데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100마일(약 140킬로) 거리에 있다. 두로는 해상 무역으로 유명하다. 두로와 남유다는 일종의 정치적 경제적 경쟁 관계였다. 남유다 예루살렘이 망하기 전까지 장로들이 예루살렘 성문 입구에 앉아서 중요한 정치나 무역 문제를 논의하고 통제했다.
   두로는 여호와의 뜻에 따라서, 적들에게 변화무쌍한 바다의 희생양이 된다. 두로는 바벨론에 포위되어서 주전 586-573년 13년을 버텼다. 그 후 두로는 바벨론에 항복하고 바벨론의 속국이 된다. 주전 570년 두로 왕도 바벨론에 잡혀간다. 주전564년에 바알이 두로의 에트바알 왕의 뒤를 이어서 두로의 왕이 된다. 바벨론의 고위 감독이 두로 왕을 교체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나라가 망하고 포로의 운명을 겪고 여호와와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고 방향을 잃었다. 에스겔서 37장은 새생명의 약속이다. 에스겔은 마른뼈들이 골짜기(평원)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마른뼈들의 환상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 여호와 이심을 드러낸다. 문둥병자 나아만을 치료하신 분은 여호와이시다(왕하5:7). 마름뼈 환상은 “숨을 쉬어라, 그러면 너희가 살리라 그리고 그들이 살았다.”로 요약될 수 있다. 여호와는 새생명의 창조주이시다.
   시편 116편8,9절은 포로기 전에 여호와께 감사드리는 개인의 간증이다.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셨나이다. 나의 눈을 눈물에서, 나의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제가 그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이다.” 이같은 예배와 찬양의 유산이 포로기의 포로된 백성들에 대한 긍정적 답이었다.
   언약 백성이 언약을 어기는 것은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37장 9절은 죽임 당한 자들에게 그들이 살도록 “호흡을 불어넣어라”고 말씀하신다. 언약을 어긴 주님의 백성을 심판하시고 죽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시다. 죽임 당한 주님의 백성을 다시 살게 하시는 분도 여호와이시다.
   요한계시록 11장 11절에 “사흘 반나절 후에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이 그들 죽임 당한 자들에게 왔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발로 일어섰다.”
   로마서 11장15절은 “그들이 거절하는 것이 세상과의 화목이라면, 그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이 아니겠느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마른 뼈들에 생명의 호흡이 들어가서 다시 사는 것과 같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1장은 북쪽에서 폭풍우와 함께 오는 구름을 보았다. 8장-10장은 성전에서 배교의 모습을 보았다. 37:1-10은 전쟁 용사들의 시신들 즉 마른 뼈들을 보았다.
    그런데 40-48장의 회복의 환상은 구체성이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에스겔의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 34장 1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보라 내가 내 양떼를 찾으리니 그들을 찾아 내리라.” 예수님도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요 10:1-18, 25-29).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이시다(요 10:30).
   요한복음 10:16의 “한 양떼, 한 목자”는 에스겔 선지자가 회복된 나라의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과 일치한다(37:22). 회복된 나라는 왕이신 한분 목자를 갖게 된다(34:23; 37:24). 요한복음 10장 16절에 모아진 양떼 중에 이방인들이 포함된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은 회복된 새로운 이스라엘을 교회로 암시한다.
   에스겔서 49장 2절 처럼 요한은 계시록 21장 10절에서 “크고 높은 산으로 옮겨져 갔다.” 거기서 요한은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보았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에스겔은 새로운 성전을 보았다(겔 40-47). 반면에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은 그 안에 성전이 없었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의 성전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이시기 때문이다.”(계 21:22).
   에스겔 48:30-35에 새로운 예루살렘의 성전이 여호와 샴마 즉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48:30-35)는 뜻이다. 예수님은 헤롯이 재건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후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구주 어린 양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성전이시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즉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히나님의 아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여 모인 여러분이 교회이다. 새하늘과 새땅, 새예루살렘에 하나님 아버지와 그 어린양과 신부된 모든 신자들이 교회인 것이다. 
Posted by 아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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